;이 되고 싶었던 .
- 하삐

- 2025년 1월 31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5년 2월 2일
2018년 9월에서 2025년 1월에 이르기까지.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나인데, 막상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행위가 고작 글을 쓰는 것이라고 하니 이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그저 어쩔 수 없이 살아갔었던 한 미개한 존재의 발버둥으로 밖에 안 느껴진다. 내가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내 감정을 진실 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더라도 글을 쓰다보면 흰 바탕에 놓여 진 검은색 선들이 내 복잡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만 같았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것들이기에.
몇 번의 시도 끝에 정말 끝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사실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미련이 없다.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지만, 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을 살았고 내 주변 사람들은 내게 과분한 정도로 너무 좋았다고 생각한다. 하루는 차갑게, 또 다른 하루는 따뜻하게 날 돌봐주던 그 손길을 난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게 그 사람들은 행운과 같다. 불행 가득한 것만 같던 내 인생에 그대들은 내게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찾을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도 하였고 반대로 어둡고 감춰지고자 하던 것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도 하였다. 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채, 짐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소중한 시간을 내게 투자해주었다. 그렇게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주었지만 나는 결국 이런 결정을 내렸고, 그에 대해 미안함만을 느낄 뿐이다.
사실 내게 무슨 일이 있었건, 내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건, 내 죽음으로 당신이 조금 아파하건, 그대들은 살아야한다. 당신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많고 내게 말해주었듯이 당신에게 찾아올 좋은 날들이 많다. 그 모든 것들이 아직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것을 기다리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그릇의 끝까지 담겨 있던 물은 흔들거리며 반도 남지 않은 채 나를 홀로 남겨두었다. 어쩌면 그 수도 없이 찾아온 흔들림 끝에 보상이 나를 찾아올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이걸로 만족한다.
2년 전 2018년 9월 12일에 작성한 유서이다. 오늘 날짜인 2020년 10월 25일, 여기서 더 하고 싶은 말은 딱히 없는 듯하다.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2년 간 더 살아오면서 좋았던 점들이라면 더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었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누구보다 잘 살고 싶다는 마음과 행복감을 느꼈다는 것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이상 삶을 연장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런 긍정적인 영향의 뒷면에는 언제나 부정적인 상황과 감정들이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공허함과 허무함은 나를 뒤따라 다녔고 나는 이를 뿌리치기 위해 셀 수 없는 양의 선을 그었다. 결국에는 제자리였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었다.
좋아지는 것 같다가도 잠시 지나면 다시 제자리였다. 그리고 지금 이 선택은 이 모든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한 나의 마지막 도전이며 그 어느 선택보다 오랜 기간 고민해온 후회 없는 선택임을 꼭 밝히고 싶다.
오늘 날짜는 2021년 2월 21일이다. 이전 글들을 쓰던 당시와 비교했을 때 삶에 대한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후회 없는 선택일 것임은 분명하지만 죽을 이유도 살 이유도 없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 상태가 변함이 없을 것 같아 밤이면 밤마다, 새벽이면 새벽마다 흉측한 어두움을 바탕으로 절망감과 무망감이 나를 찾아오게 했고 홀로 그 시간들을 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대학 결과들을 앞둔 채 딱히 해야 할 것도 없어 아무런 걱정 없이 편히 쉴 수 있는 이 시기에 자살을 생각한다는 건, 내가 분명 많이 지쳤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아니, 숨을 쉬고 별거 하지 않고 사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를 의미한다. 나를 진정으로 아끼던 사람들이었다면 내가 이 선택을 실제로 실행하기까지, 그리고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당신들의 잘못은 단 한 개도 없다는 사실만큼은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에 의해 변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것’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탓하지 않기로 했다. 숨 쉴 공간 하나 만들어주지 않던 세상도, 내가 힘들 때 용기를 내어 도움을 요청했으나 어렵게 내민 손을 뿌리친 사람들도, 따지자면 나를 힘들게 만든 가장 원초적인 근원이 되는 나 자신 조차도 탓하지 않기로 했다. 열두 살 소녀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자살 예방 교육에서 처음 자살을 접한 그 순간부터 스무 살 성인이 되어 책상 앞에 앉아 마지막이 될 이 글을 쓰기까지 열 번도 넘는 자살 시도와 쉰 개가 넘는 자살 계획과 수백 개의 줄을 온 몸에 그어왔다. 그리고 비로소, 오는 2021년 3월 7일 나는 나를 괴롭히고 옥죄던 이 세상과 동시에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
오래전부터 나는 놀이터에서 개미가 아이들의 신발에 소리 없이 밟혀 죽듯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랜 시간을 이 세상에서 버텨왔고 이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과 연을 이었다.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에게 나의 죽음이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들은 강하기에 나를 잊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럴 수 없다고 해도 나를 위해 그리 해주었으면 한다. 나는 이 날 이후로 내가 생각하는 해피엔딩을 맞았으니, 당신들도 본인만의 해피엔딩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년이라는 짧으면서도 긴 세월 동안 나라는 사람을 당신들의 삶을 스쳐지나갈 기회를 주어서 너무나도 감사하다. 고맙고 미안하다. 그럼 잘 지내, 안녕.
오늘 날짜는 2021년 5월 19일이다. 아마 이 글이 업데이트 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 후 어떠한 연유에서든 더 이상 글을 작성하지 않았다.)
2022년 6월 30일. 올해로 이 지독한 자살 충동에서 발버둥친지 12년째이다. 이제는 인생의 가장 본질적 질문이라고 생각되는 죽음에 대한 마음을 품고 산 나날들이 그렇지 못한 날들보다 더 많다. 2019년 12월, 우연히 내 주치의를 맡아주셨던 선생님께서 정신분석 치료를 제안해주셔 2022년 현재까지 면담을 진행하게 되며 나는 많이 변화했다. 이 치료 과정을 통해 나는 나를 돌아보는 힘을 길렀고 내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생각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태도도 달라졌다.
좋은 변화였는지 그렇지 못한 변화였는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그래도 좋은 면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서도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감정적으로 힘들어서 죽음을 생각한다기보다는 그저 그게 논리적으로 이 세상이 내게 던지는 질문의 정답인 것 같아 이 길을 택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해온 모든 노력들은 모두 오답이었으며, 그 오답들에 대한 풀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많은 오답을 거친 후 정답을 찾게 되었을 때 느낄 희열을 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답에 도달하였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그저 삶이라는 질문에 오답이었다.
과거의 나는 날짜를 정확히 정해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완벽한 시간대에 완벽한 상황 속에서 죽음을 원했다면, 최근 나는 아무리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계획을 세우더라도 완벽한 죽음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너무나도 예측 불허한 변수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완벽한 죽음을 이루기 위해 불완전한 죽음을 택하기로 하였다.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나를 덮쳐 어떠한 고통도 오늘은 겪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날, 죽을 기회가 찾아온다면 자살을 시도하기로 결심하였다. 여전히 나는 삶에 미련이 없다. 다만 따뜻한 사람의 기운을 조금 더 느끼고 싶을 뿐이다. 그럼에도 가야할 때가 된다면 뒤 돌아보지 않고 떠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날이, 그 ‘때’이지 않을까 싶다.
몇 년 전에는 내 죽음에 슬퍼하지 말라했으나, 근래에는 애초에 나의 죽음을 애도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의 김하영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흉측하고도 새까만 마음을 품고 살아온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무의식중에라도 당신들의 머릿속에는 결국 내가 이런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언제든 어제까지의 삶 이후를 그려보면 당연히 나의 자살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잇고 끝낼 수 있는 전개라고 생각되겠지.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살아온 삶에 후회가 있다거나 지금의 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것은 아니다.
단연코 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내가 이와 같은 선택을 한 이유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이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오며 수많은 질문들을 내게 던졌고, 그 질문들은 질문들을 만들어 나를 끝없는 물음표에 둘러싸이게 했지만, 마침내 나는 오늘 마침표를 찍는다. 감히 나의 선택에 대한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항상 그랬듯이 ‘그저 그렇게 된 것’으로 남겨졌으면 한다. 나와 다르게 매일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대들의 문장은 형형색색으로 예쁘게 꾸며지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이 글을 보게 될 당신들의 희망은 지켜지기를 기도하며 이만 글을 줄인다.
위는 2022년 6월 30일에 최종 작성했던 글이다. 오늘 날짜는 2023년 8월 17일. 당시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는 연유로 설명을 그렇게까지 붙였는가 싶다. 이제 더는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없다. 한 번은 글을 다르게 마무리해야할 것 같다 생각했고, 그것이 오늘일 뿐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자에게 관심이 없고, 그렇기에 이 글 또한 의미가 없음을 오늘의 나는 안다. 굳이 따지자면 엄마의 의문을 풀어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언제나 최선을 따지던 나였다. 최선의 삶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내가 이 선택을 하기까지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 등등
이제 나는 이 수많은 물음표로부터 해방된다. 언제부턴가 최선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엔 최선이었을지라도, 돌이켜보면 아닐 수 있고, 내겐 최선이어도 타자에겐 최선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최선을 좇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다 그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 되기로 했다. 이따금 죽음에 최선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삶에도 최선이라는 것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또 최선의 삶으로 살아온 내가 고작 이런 형태라 더 좌절스럽기도 했다. 차라리 최선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살아온 삶의 족적에 후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살아졌고,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살아지다 사라지는 것. 어찌 보면 이보다 자연스럽게 섭리에 따라 흘러가는 듯한 결말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의 노력을 했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논리적으로 타당성을 붙여가며 지금의 내가 느끼고 판단하는 것들이 옳고 그른지 따지지 않기로 했다. 과거에 다르게 행동했거나 다른 환경 속에 나를 노출시켰다면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을까, 가상의 상황을 수없이 그려가며 나 자신을 수많은 실험체로 분류하며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올해 초여름, 어쩌면 나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드는 내 자신을 발견하며, 살고자 하는 내 자신 또한 받아들이고 난 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덮쳐올 때마다 저항하곤 했다. 친구에게 손 뻗어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갖은 서적들을 뒤져보며 나아지는 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게 나아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언제나 그렇듯, 제자리 아닌 제자리다. 제자리가 아닌 것은 아는데, 결과적으로 제자리다.
너무 힘들다. 나는 너무 지쳤다. 이제 그만 나를 놓아준다.
최선이었다 하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충분히 노력했다.
그렇다.
안녕,
유독 ‘최선’이라는 이름에 목매던 김하영이 남기는 글.
오늘 날짜는 2025년 1월 31일. 지독하게도 18개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다. 과거의 나는 절대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삶을 지속해버렸다. 또 Y의 말대로 수많은 번복을 반복하며 지금도 나는 살아 숨쉬며 글을 써내려가고있다. 완전하게 작성된 글에 굳이 말을 덧붙이는 이유는 가치관에 관한 인지의 변화 때문이다. 오늘의 나는 자살 사고가 강박적 사고에 의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의미도 가지지만, 아무리 도망쳐도 뒤따라오는 자살 사고가, 이제는 마치 원래 그자리에 있었던 듯, 괴리감 없는 나의 일부 같다. 그래서인지, 예고없이 찾아오는 괴로움에 떠오르는 자살 사고가 ‘상태에 의한 사고’임을 알아도 견디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자살로부터 더 가까워진 것을 기회로 받아들이고,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나는 이 기회를 통해 끝맺음을 내어야한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놓아야 한다고 스스로 계속해서 되뇌인다. 놓을 때가 왔다면 놓아야한다는 것을. 언제부턴가 선생님께 온전히 의지하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힘듦을 주변 사람에게 말하는 법을 잊었다. 아무리 검색해보아도 도움을 주는 방법만이 나열되어 있을 뿐, 말하는 법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손을 내미는 법을 잊은 나는, 홀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마지막 순간을 하루도 빠짐 없이 그려왔다.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거쳐야하는 과정이기에, 아주 조금씩 미련과, 희망과, 슬픔과, 따뜻함과, 그리고 누군가는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놓아주었다.
비로소 나는 알았다. 내가 이제 기회를 놓치지 않을 준비가 되었음을. 그리고 스스로 다시금 속삭인다. 괜찮아, 이제 다 왔어. 견디느라 수고했어. 이제 그만 괴로워도 돼. 어쩌면 저 반대편의 다른 목소리를 내는 나를 외면하며 걸어온 지금, 결국엔 나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나는, 세상에서 내게 가장 차가운 사람이고, 그래서 내가 나를 죽이게 된 것임을 알아버린 밤. 그리고 가장 마지막 남은 한 줌 서글픔을 놓기 위해 남기는 말,
고마웠어요.




이서린이 아이폰 12 미니로 아이폰 22까지 사용시, 김하영의 재산의 1프로로 당시 최고의 아이폰을 선물함을 서약합니다.
2025년 2월 1일 오전 7시 40분.